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문단 편집) ==== [[포스코]] 설립 ==== || {{{#ffffff '''포항종합제철공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7-1Znpf3YVk)]}}} || 만주군 복무 당시의 경험으로 철강 산업은 공업입국을 위해서는 가장 근본이 되며, 수입대체가 시급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박정희는 집권 초, 제 1차 경제 개발 계획제철소 건립을 강력히 추진하였지만, 이는 결국 60년대 초 초기 경제정책 실패 후 개혁안의 일환으로서 흐지부지 되고만다. 하지만 이후에도 박정희는 제철소의 건립을 포기하지 않았고,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포항제철의 건설은 시작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의 끈질긴 요청에, 1966년 12월에는 제철소를 건립을 위한,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1968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미국도 한국은 아직 이런 거대한 규모의 제철소는 시기상조이고, 지금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우선해야할 시기라며 반대했다, 박정희 정부의 제철소 건설은 난관을 겪게 되어 결국 미국을 주축으로한 KISA는 결국 한국의 제철소 건립은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해 차관도입을 거부했다. 건설 자금은 총 1억 3,070만 2,000달러이며, 그중 외자는 무려 9,570만 2,000달러, 내자는 3,500만 달러였는데 그 중 외자 지급이 거부된 것으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위졌지만, 당시 [[한일협정]]에서 받아내 대일청구금과 기술제공으로 KISA의 내부 자본금을 대체하여 설립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박태준]]에게 포항제철소 건설 사업을 일임하게 하였다. 결국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은 착공되었고,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설비를 가동시킨 지 단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남는 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후 포항제철은 단 한번의 적자도 없이 빠르게 성장했고, 대한민국은 철강의 수입대체를 완벽하게 이룰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70년대 빠르게 중화학공업으로 입국할수 있었던 큰 힘으로 평가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포스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